종교

타우 십자가

Joannes 2015. 8. 7. 22:15

  

 

 

 

  

 

 타우(T)란

 

타우(Tau)는 십자가의 일종으로서

역사적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 프란치스코의 생활과 행동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나아가 신심의 대상이 됨으로써 성 다미아노 십자가와 더불어

탁월한 프란치스칸 상징의 하나가 되었다.

 

타우(T)는 그리스어 알파벳의 아홉 번째,

그리고 히브리어의 스물 두 번째 즉 마지막 글자이다.

타우는 성경적으로 ‘하느님의 것’이란 표지요

‘구원의 표’로 인식되었다.

이에 대한 언급은 에제케엘 예언서에 나온다.

“이마에 표(타우)가 있는 사람은 건드리지 말아라”(에제 9,6).

여기서 말하는 타우 표시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집트에서 구원되었듯이(탈출 12, 21-28 참조),

타우 표를 지니는 사람은 구원의 표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타우 표시는 성서적인 표지일 뿐 아니라

로마의 카따콤바들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오랜 그리스도교 전통을 지니고 있다.

 

 

 

1. 성 프란치스코의 문장이요 서명인 타우

 

“프란치스코는 어떤 글자보다도 타우(T)자를 좋아하였고,

그 타우로 친히 편지에 서명하였으며, 방마다 벽에 타우자를 붙였다.

그리고 천상의 환시를 목격한 하느님의 사람인 파치피코가

자기의 두 눈으로 복되신 사부님의 이마에서 커다란 타우 표시를 보았다.

그 글자는 여러 색깔로 되어 있었고, 황금빛을 내고 있었다.”

(3첼 3: 대전 4,9 참조)

또한 “이 표시는 프란치스코가 일 때문이나 사랑으로

어떤 글을 전해야 할 때 편지에 표시했던 바로 그 타우자였다”(3첼 159).

 

이렇듯 타우에 대한 프란치스코의 경건한 애정과 깊은 신심은,

역시 타우로 서명하도록 권장한 성 보나벤투라에 의해

더욱 강하게 부각되었다.

“프란치스코는 항상 이 특별한 표시(타우)에 대해서 큰 존경심을 지니고 있었으며

종종 다른 이들에게 그것을 사용하기를 권했다.

그는 그것을 모든 편지 끝에 써넣곤 하였는데,

이는 마치 그의 유일한 소망이 에제키엘의 예언에서 읽을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인

‘탄식하며 우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타우)를 해주는 것’(에제 9,4)같았다.”(대전 4,9)

또한 “그분 자신이 활동하기 전 그때마다 타우로써 표하였다.”(소전 2,9)

 

 

 

2. 성 프란치스코가 남긴 타우 표시들

 

이렇듯 타우 표시가 프란치스코에 의해

중요한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전기작가들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직접적인 역사 자료들을 보기로 하자.

 

첫 번째 사료는 1229년에서 1238년 사이에

수비아코 분도회 수도원의 미사 경본에 쓰여진

“모든 성직자들에게 보내신” 두 번째 편지의 사본이다.

이 사본에는 그의 편지와 더불어

그의 타우 서명이 정교하게 베껴져 있다.

 

두 번째 사료는 현재

아씨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유물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

성 프란치스코가 라 베르나에서 영원한 구원에 대한 의심과

낙심에 빠져 있던 ‘레오 형제에게 써준 축복문’이다.

프란치스코는 이 축복문에 타우 표시를 남겼다.

레오 형제는 이 축복문의 끝부분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복되신 프란치스코가 나, 레오 형제에게 자신의 손가락으로

이 축복문을 써주셨습니다.

 

끝으로

폰테콜롬보의 막달레나 성당의 오른쪽 복음을 앍는 쪽 위의

창문턱에 남아있는 붉은 색 타우를 들 수 있다.

이것은 15세기부터 흰 석회 도료로 덮혀있던 것인데

1920년대 초에 발견되었다.

이 타우가 그려진 시기는 성 프란치스코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러한 사료들에 덧붙여 그분의 사후에 일어난 다음과 같은 기적들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오스티아 교구내 코리 출신의 한 주민이 한쪽 다리를 완전히 못쓰게 되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그의 이런 사정을 모르는 채 할 수 없었으니

한 동료와 함께 그에게 나타났다.

성인은 그의 간청을 들어주러 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타우자가 밑에 새겨져 있는 지팡이를 그의 환부에 갖다 대었다.

잠시 후 상처가 아물고 환자는 건강을 회복했으며,

지금까지도 성인이 당신의 지팡이를 댄 그 자리에서

타우자를 볼 수 있다.’(3첼 159)

 

 

 

3. 성 프란치스코의 타우 신심에 직접 영향을 준 계기들

 

성 프란치스코의 타우에 대한 깊은 신심이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그는 아주 오래된 그리스도교 신앙으로부터는 물론이고,

당시의 학문적이면서도 유행하던 신비적,

성경적인 흐름의 영향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제 4차 라테라노 공의회와

성 안토니오 병원 수도회 수도자들이었다.

 

 

 

1) 제 4차 라테라노 공의회

 

1215년 개최된 제 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는

공의회 교부 자격으로 2212명이 참석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주교가 412명, 아빠스들과 수도회 장상들이 800명,

그리고 각계 각층의 인물들로서 신학자들, 대사들,

수도회의 공의회 대표들과 영적운동의 지도자들이 포함되었다.

1209년 이미 회칙의 구두 인준을 받았던 프란치스코는

바로 이 영적운동의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2첼 17; 회칙 해설 서문 14; 작은 형제회 연대기 III, 9쪽 등 참조)

 

프란치스코의 라테라노 공의회 참석 사실은

도미니코회 제라르드 파쉐(Gerard Fachet)

프레몽트레회의 부카르도 디 우르스페르그의 증언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이 공의회에서 이노첸시오 3세 교황은

“성 프란치스코에게 내려주신 복음적 생활과 회칙에 대하여

모든 고위 성직자들과 수도회의 장상들,

그리고 프란치스코를 따르려는 이들에게 알렸다”.

(회칙 해설 서문 14; 참조 페루 67)

 

그런데,

공의회에 참석한 프란치스코에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바로 1215년 11월 11일에 있었던

교황 이노첸시오 3세의 공의회 개막 연설이었다.

교황은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 너희와 이 과월절 음식을

함께 나누려고 얼마나 별러왔는지 모른다”(루카 22,15)

말씀을 주제로 택했다.

여기서 그는 ‘파스카’가 ‘과월절’을 의미한다는 것을 환기시키면서

공의회야말로

‘새로운 과월절로서 삼중전이(즉 육체의, 영신의, 영원불멸의 전이)

계기가 되리라는 희망을 표명하였다.

 

육체적 전이(轉移)

예루살렘 성지 회복을 위한 군대 출정으로 깨닫게 되고,

영적인 전이는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아가는 것으로서

보편적인 교회의 개혁인 회개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생명에서 참 생명에로의 영원한 전이는 성사들의 의미,

특히 성체성사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교황은 영적인 전이를 말하면서 “예루살렘 시내를 돌아다니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발칙한 짓을 역겨워하고,

탄식하며 우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타우)를 해 주어라”(에제 9,4)라는

말씀을 상기시켰다.

 

이어 교황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타우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마지막 글자요

그 형태가 빌라도에 의해 명패가 붙여진 예수님의  십자가

그 이전에 보여졌던 십자가를 나타내줍니다.

 

타우(T)

십자가의 광채가 자신의 모든 행위에서 드러나고,

사도 바오로가 말하듯 악습과 죄악과 더불어

자신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을 때 이마에 지니게 되는 표입니다.

그러니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 위가 아니라면 그 어떤 것에도

나의 영광을 두고 싶지 않으며,

그 때문에 세상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나는 세상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그러니 타우와 십자가의 승리자들이 되십시오!”

 

프란치스코는

교황의 연설을 자기에게 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교황은 “자비가 그리스도 안에 회개와 쇄신의 삶의 표인

타우를 지니고 있는 이들에게 베풀어질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프란치스코는 스스로 그리고

그의 동료들이 타우 표시를 하기를 바랐으니,

타우는 형제회 성소의 표지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타우는 전적으로 그의 하나의 영성으로 충만하였고,

1215년 이후부터

더욱 더 십자가와 구원에 대한 하나의 영성이 되었다.

이는 그가 쓴 ‘주의 수난 성무일도’에 잘 나타나 있다.

회개의 타우는 프란치스코가 자신을 교황에 의해 결성된

십자군에 입대한 것으로 간주하였기에, 그의 마음에 드는 주제였다.

 

성사와 성체생활(영원의 전이에 관한 교황의 세 번째 주제)

타우 또한 우선 관심사 중의 하나였다.

“회개의 삶을 사는 것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것”,

뗄 수 없는 두 방식은 그 후의 대부분의 교황 서한들에서 언급되었다.

성 프란치스코의 성체성사에 대한 남다른 관심의 배경에는

라테라노 공의회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성직 II, 2; 권고 1 등 참조).

 

 

 

2) 성 안토니오 형제들

 

라테라노 공의회와 더불어 은수자 성 안토니오 형제들과의 만남

또한 성 프란치스코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성 안토니오 형제들과의 만남을 보기 전에 먼저

그의 나환우에 대한 생각과 태도를 상기해 보는 것이 좋겠다.

프란치스코는

당시 전례나 조형 예술, 문학 등을 통하여 표현되었던

나환우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비에 젖어 있었다.

그가 나환우들을 “나의 그리스도교 형제들!”이라고 부른 것은

신비적 개념으로서 심오한 뜻을 담고 있다.

그는 나환우들 안에서 고통받는 그리스도였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나의 그리스도교 형제들”이란 “나의 형제 그리스도”와 같았다.

그는 생각 뿐만 아니라 나환우들에 대한 봉사로써

그리스도께 대한 봉사를 시작하였다(유언 2).

그는 오상을 받은 뒤에도

이러한 생활 양식으로 그의 온힘을 기울이길 열망하였다.

 

나아가 그는 자신 뿐만 아니라 누구든 형제회에 들어온 뒤에는

과거에 귀족 신분이었든 떠돌이 신분이었건

그 무엇보다도 나환우들을 위해 봉사하며

그들의 병원에서 살도록 배려하였다(뻬전 102).

형제회의 초기 삶은 고정적인 수도원에서의 삶이 아니라,

자주 기도나 설교 또는 일의 필요성에 따라 성당이나 수도원에서,

그 지역 주민과 함께 혹은 병원에서 일시적으로 머무는

순회의 삶이었기에 나환우들과의 삶은 초기 형제들에게 있어

삶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제 성 프란치스코와 성 안토니오 병원 수도회

형제들과의 만남을 보기로 하자.

프란치스코는 1209년 로마에 갔을 때 라테라노 부근의

성 안토니오 병원에 묵었다(대전 4,8).

이 사실은 후에 나콜라스 4세 교황이 된

아스콜리의 제롤라모가 전하는 것으로서,

이노첸시오 3세의 친척인 리카르도 데 안니발디스 추기경의

목격 증언에 따른 것이다.

바로 이때 성 프란치스코는 성 안토니오 병원 수도회 형제들과 만났다.

 

성 안토니오 병원은 1095년 프랑스의 생 안뜨완느(Vienne)에서 창설된

성 안토니오 수도회에 의하여 운영되었다.

이 수도회는 13세기에 프란치스코가 머물렀던 로마 수도원을 비롯하여

369개의 분원을 가진 국제적 규모의 수도회였는데,

18세기에는 큰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이들의 주요 활동은 환자들, 특히 나환우들을 보살피는 일이었다.

당시 유행하던 병 중에는 호밀의 깜부기에서 발생하는 독 때문에

피부가 썩어가는 병이 있었다.

그런데 이 병에 걸린자들 중에는 나환자로 취급되는 이들도 많아서

그 병을 ‘성 안토니오의 불’이라고 할 정도로

안토니오 수도회 형제들에게 맡겨졌다.

 

그들의 치료법은 이색적이었다.

그들은 수도원 ‘거룩한’ 포도밭에서 소출한 포도로 만든 포도주를

성 안토니오의 유해 위에 부은 다음 다시 모아서

환자들의 환부에 바르고 성수를 뿌리곤 하였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그들이 타우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항상 내세웠으며,

작은 형제들과의 교제의 표시로 또 자선활동의 표지로서

타우 형태의 지팡이를 짚고 다녔으며, 검은 수도복에는

커다란 푸른 색 타우를 붙이고 다녔다는 것이다.

 

이들이 십자가 모양의 타우를 즐겨 사용한 것은

신비적 신심운동 및 자선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즉 병원 수도자들은 타우를 공경하면서 환자들에게 가져올

육체적 영신적 구원의 상징으로서 그것을 휘둘렀던 것이다.

게다가 정신 건강에 대한 상징으로서의 타우의 사용은

오랜 세기에 거쳐 회개의 힘과 자극이 되어주었으며

종교적 정신 문명에 깊이 배어들었다.1)

 

1210년

성 프란치스코와 성 안토니오 병원 수도회 형제들과의 만남은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타우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되고

신심을 갖게 된 충격적인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만남이 그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는

그후에 쓰여진 그의 글들에도 잘 나타나 있다:

“형제들은 천하고 멸시받는 사람들,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

병자와 나병환자들, 길에서 구걸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낼 때

기뻐해야 합니다.”(미칙 9,2)

또한 돈에 대해서도 “그러나 형제들은 나환우들을 위한 부득이한

사정 때문이라면 동냥할 때 돈을 청할 수 있습니다.”(미칙 8,10-11)

파격적인 태도를 보인다.

 

따라서 성 안토니오 수도회의 형제들이 타우에 관하여

프란치스칸 영성에 끼친 독창성은, 고통받는 그리스도를 깊이

관조한데서 온 겸손과 자선의 고리라고 할 수 있다.

 

 

 

맺는 말

 

타우 표시는 그의 십자가에 대한 신심 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전 인격과 사명에 대한 그의 신심을 보여준다.

프란치스코에게 있어서 타우는 구원에 대한 보증이었다.

이 점은 영원한 구원에 대한 의혹과 절망감에 빠져 있던 레오 형제가

프란치스코가 써준 축복문과 거기에 써진 타우 표시를 통하여

희망을 찾게 되었던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타우는 그에게 있어 보편적인 구원의 표지였다.

그래서 그는 형제들에게 길을 걸을 때나 나뭇가지 위에서나

새들의 무리를 보았을 때, 어디서든 “...

당신의 거룩한 십자가로써 온 세상을 구속하셨나이다”(1첼 45)라고

기도하도록 하였다.

 

그에게 타우는 영원한 회개와 가난의 표지였다.

타우로 낙인찍히는 것이 그에게는 바로 가난의 동기요 삶이었으며,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처럼 죽음에 이르기까지 다른 이들에 대한 섬김과

선교의 기치로서 타우를 내세웠던 것이다.

 

끝으로,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타우는 하느님의 선과 사랑의 표지였으며(2첼 172),

그의 영광의 명패였으며 완전한 기쁨의 원천이었다(권고 5,8; 잔꽃 8).

오늘, 나에게 타우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주석1) 역사가 뚜르의 그레고리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546년 프랑스 남부에 심한 역병이 휩쓸고 있을 때

끌레르몽의 주교 성 갈(St. Gall)이 장엄행렬을 주도하고 있었는데,

동시에 그곳 농부들은 집들과 성당 벽위에 타우 표시가 나타나는 것을 보았고

극성을 부리던 전염병도 일시에 그쳐버렸다.

 

 

 

평화의 사도 성 프란치스코가 묻힌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2층 성당 입구 앞마당 모습입니다.

비스듬한 언덕에 나무를 이용해서 타우 십자가와 PAX(평화)라는 글자를 조경해 놓았습니다.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Basilica di San Francesco)
가난한 이들의 친구인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가 태어나서 살고, 죽고, 묻힌 아시시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수도원 같다.

매년 수백만의 순례자가 찾아오는 신앙의 도시 아시시의 언덕길을 올라서면

돌로 된 거대한 성당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코 수도원과 프란치스코 대성당이다.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간결하게 지어진 아랫성당(1층)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윗성당(2층)이 포개진 모습이다.

1228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Gregorius IX)성당 건립을 위한

모금을 인준하는 칙서를 공포한 후 그 해 성전 건축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착공 22개월만인 1230년에 건립된 아랫성당은 중앙통로만 있었고,

제단 3m 아래에 성인의 유해를 안치하였다.

1236년 윗성당의 지붕이 덮여졌고, 1239년에 종각이 완성되었다.

 

오늘날 프란치스코 대성당이 자리한 곳은 원래 아시시 외곽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 기피하던 ‘죽음의 언덕’이었다.

이곳에 성당이 자리하게 된 것은 성인의 유언 때문인데,

평생 누더기를 걸치고 가난하게 살던 프란치스코 성인은

예수님께서 해골산에서 돌아가시고 묻히심으로써 새 생명을 피워냈듯이

자신 또한 버려진 ‘죽음의 언덕’에 비천하게 묻히기를 원하였다.

 

1층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의 무덤성당에는 성인의 유해를 담은 석관이 있고,

그 석관을 중심으로 안젤로, 맛세오, 레오, 루피노 등

초기의 네 동료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그리고 성인의 무덤 맞은편에 야고바 부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성인의 무덤과 예술가들의 조각과 그림으로                                                                가득 차 있다.
로마네크스 양식으로 지어진 아랫성당에는 성인의 묘와 그리스도의 탄생,                                                          유아 대학살, 프란치스코의 죽음 등을 다룬 프레스코화가 있다.                                                                       그리고 윗성당에는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6?-1337년)가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애를 그린 28폭짜리 유명한 프레스코화가 있다.

 

이 대성당의 그림들은 이탈리아 회화의 새로운 세계를 개척했다는 평을                                                            얻을 정도이며 유네스코에서 관리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1997년 엄청난 지진 피해를 입어 지오토의 그림 일부가                                                                유실되었으나 일부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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