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음악

신상옥과 형제들의 임쓰신 가시관 외...

Joannes 2011. 10. 9. 23:26

 


임쓰신 가시관

 

 

 

서울 가톨릭 신학 대학교 낙산 중창단 1집(1986)

 

01.임쓰신 가시관

02.태양의 찬가

03.Ecce ego mitte me

04.영산강

05.저 하늘 높이

06.스핑크스의 전설

07.터

08.꽃들에게 희망을

09.갈매기의 나라로

10.내마음

11.다리

12.하느님은 사랑이니

13.The Exodus

전곡 듣기

 

 

             

 

 

 

     

     

     


    내가 초등학생 때 할머니께서 원인 모를 병에 걸리셨다.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가 성가병원에서 치료하시고
    미사도 드리자고 권하자 할머니는
    “나는 예수고 마리아고 다 싫어. 굿 좀 해줘 굿!”
    그래서 진짜 굿을 하게 되었는데
    무당의 말이 손자 한명이 당제에 들어가
     조상신에게 절을 하면 낫는다고 했다.

    무섭기도 했고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의 소리 없는 반대도 있어
     6, 7명 되는 손자들이 우물쭈물 하고 있는데
    내가 나서서 당제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사실 할머니는 “예수는 나의 라이벌이니라.” 하시며
    가톨릭을 들여온 어머니를
    원수같이 생각하셨던 분이었기 때문에 손자의 그 행동은
     할머니에게 흡족한 기쁨을 드렸던 집안의 큰 사건이었다.

    이처럼 나는 어릴적 주님보다는 무속적 신앙을,
    성가보다는 유행음악을,
    착하게 사는 것보다는 무섭고 힘센 사람이 이끌어가는
    세상을 접하면서 살았다.

    사실은 사랑을 무지 받고 살면서도 사랑이 뭔지 몰랐고
    누구나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아무튼 할머니는 완전쾌유 되셨고
     모든 공을 나에게 돌리셨다.

    그런데 그때 나는 당제에 들어가서 절만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도 했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하느님, 저의 할머니를 낫게 해주소서.”
    라고도 기도했었다.

    당제에 들어가기 전
     어머니께서 귓속말로 부탁하셨기 때문이다.

     


    훗날 할머니는 내가 신학생이 되었을 때
    ‘안나’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셨고
    나의 큰 후견인이 되셨다.

    나는 이러한 세월을 통하여,
    각자에게 다른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하시는 주님을 느꼈다.

     


    세상을 살다보면 사람에게는 세 번의 기회가 있다는데
    나의 경우는 신학교 입학이 그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된다.

    지금으로부터 21년 전, 목청이 좋았던 나는
     성가와 가요, 가곡을 적절히 구사하고
    야구중계까지 하며 성당에서는 물론,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선생님을 즐겁게 해 주었다.

    학교에서는 음악선생님과 친구들이
     음대에 진학하여 성악가가 되기를,
    성당과 부모형제들은
     신학교에 가서 사제가 되라고 권유하였다.

     


    당시 학교에서는
    성악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홍난파의 음악을 기념하는
    ‘난파 가곡제’라는 전국대회가 있었고
    성당에서는
     교구에서 주최하는 ‘청소년 성가 경연대회’가 열렸다.

    그때 나는
    성악가가 되기 위한 꿈으로 가득차 있던 때라
     ‘난파 가곡제’에 심혈을 기울였다.

    난파 가곡제에 앞서 열렸던 ‘청소년성가경연대회’에서
    나는 합창, 독창 그리고 중창 부문에서
     모두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교구의 스타가 되었다.

     


    당시 음대에는 특차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입상 5위에만 들면 S대 음대를 갈 수 있었다.

    지역예선을 1등으로 통과한 나는
    성악의 메이저리그인 난파 가곡제에 도전한 것이다.

    함께 가셨던 교장선생님, 음악선생님, 어머니, 형
    그리고 친구들 모두 나에게 격려와 기도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20여명의 참가자가 모여 제비뽑기를 한 결과
    내가 맨 먼저 부르게 되어 무척 떨렸다.

    그때 무지 떨고 있었던 나에게 큰 형이
    “이걸 먹으면 떨지 않고 너의 끼를 충분히 발휘 할 수 있다.”

    고 하면서 소주가 담긴 봉지를 내밀었다.
     
    형이 왜 그리 고마운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소주를 들이키고 무대에 올라
    첫 곡 ‘그대를 사랑해’를 분위기 있게 잘 불렀다.

    마음속으로 ‘난 1등이다.

    누가 나보다 더 잘 할 것인가.’ 생각하며 자신에 차 있었다.

    그런데 나의 18번이었던
    두 번째 곡 ‘석굴암’을 부르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어질어질하면서 피아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자타가 우승 후보라고 공인했던 나는
     10등 안에도 못 들었다.

    엉엉 울었다.

    그런데도 형이 원망스럽지 않았고
    미련이나 불만도 생겨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어릴적 늘 말씀하시곤 했던
    “세상은 믿을 존재가 아니라 사랑할 존재다.

    누구를 의지하지 말고 오로지 사랑하고 살아라.”는
    말씀 덕분이었던 것 같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고민을 거듭한 끝에
    어머니가 원하셨던 신학교에 갔다.

    그러나 신학교 생활은 나에게는 힘겨웠다.

    그래서 당시 신학교 학장이셨던
     최윤환 신부님을 직접 찾아뵙고
    “신학교를 나가야 되겠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왜 나가려 하느냐고 물으셨다.

    “저는 확신도 없을뿐더러 가수가 되고 싶습니다.

    지금 빨리 서두르지 않으면
    여기에 묻혀서 이것도 저것도 안 될 것 같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최 신부님께서는 무슨 가수가 되고 싶냐고 또 물으셨다.

    조용필이나 송창식처럼
     인기 있는 가수가 되고 싶다고 했더니 “참 좋은 생각이다.

    그런데 ‘하느님 가수’가 되라.”고 하시며
    “네가 자유롭고 싶은가 본데
    밖에 나가서 친구들도 만나고 여자도 만나고
    부모님도 만나 뵙고 하루 실컷 놀다 와라.

    그래도 힘들면 여름방학도 있으니까
    그때 다시 생각해 보자.”고 하셨다.

    그러면서 서랍에서 3만원을 꺼내 주셨다.

    84년도니까 꽤 큰돈이었다.

    그 돈을 받아들고 나와서 어머니도 만나고
    친구들과 실컷 놀고 다시 들어가서는
    ‘그래, 나를 이렇게 아껴주시는 신부님이 계신데 해보자.’
    고 다짐했다.

    그 뒤로 7년을 더 공부하게 되었다.

     


    84년, 하한주 신부님의 시 ‘사제상’에 곡을 붙여
    ‘임 쓰신 가시관’이란 곡을 만들었다.

    서울 가톨릭 대학 ‘낙산 중창단’의 음성으로
    여러 차례 발표하여 큰 호응을 얻게 되었고
    나도 성가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신부님과 학생들의 격려 속에 ‘임 쓰신 가시관’이
    음반으로 나오던 날,
     침대에 들어가 감사의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모른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기쁜 날이었다.

    어느 날 김수환 추기경님이 신학교에 오셔서
    “여기 요즘 돌아다니는 유명한 곡이 있다던데
    나 좀 한번 들려줘봐.” 하시는 거였다.

    신학생들이 다 일어나서 ‘임 쓰신 가시관’을 불렀다.

     


    “임은 전 생애가 마냥 슬펐기에
    임 쓰신 가시관을 나도 쓰고 살으리라~”

    추기경님께서 눈을 지그시 감고 들으시더니 “
    참 좋다.”고 하셨다.

    그 기회를 놓칠세라 “저희, 방학 좀 주십시오.” 했다.

    추기경님의 표정이 근엄하게 바뀌시며
     “한 번 더 불러봐.” 하시고는
    신학생 400명 전부에게 3박 4일 휴가를 허락하셨다.

    음악은 그토록 위대한 거였다.

    그러나 부제품을 앞두고도 나는 확신이 없었다.

    ‘그냥 신부되자. 신부돼서 또 철들겠지.
    뭐 크게 잘못한 것도 없고 열심히 살았으니까…’하는 정도로.

    1년만 더 공부하면 신부가 될 시점에서
    당시 교구 성소 국장 신부님께서
     나에게 사제 성소의 꿈을 접으라고 하셨다.

    신부님은
     “네가 지금은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오늘의 이 결정에 대해서 감사할 날이 올 것이다.”
    고 하시면서 무척 섭섭해 했던 나를 달래주셨다.

    노래 절제도 안되고 성적도 나쁘고
    책임감도 부족하고….
    내가 나를 봐도 학교에서 잘 내보내 준 것이다.

    속 시원 하기도 했지만,
    사제가 된 친구들이 고뇌할 때
    내가 더이상 위로가 되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슬프다.



    현재 나는 성악가도 아니고 신부도 아니다.

    평범한 가정을 가진 성가가수가 된 것이다.

    가끔 내 옆에 있는 아내와 세 아들을 보면서
    성소 국장 신부님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감사를 드린다.


    하느님은 나에게서 이렇게 모든 것을 가져가시는 듯 했지만
    나에게 주님의 마음과 사랑을 전달할 성가를 만들고,
    부르고, 공연할 기회를 주시며
    이 벅찬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주셨다.

    나에게 꿈이 있다면 하느님을 더 가까이 보는 것,
    내적으로 하느님을 확실히 만나는 것이다.



    솔직히 “상옥아! 나 하느님이다. 악수 좀 하자.”
    그러시면 좋겠다.

    많은 분들이 나에게 목이 쉬었을 때도
    최선을 다해 노래 부르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하신다.

    나는 주님께서 주신 이 목소리로
    주님을 죽도록 찬미하는 ‘하느님 가수’가 되고 싶다.



     서울 가톨릭대학 신학부 졸업.
    수원 가톨릭 대학 대학원수료.
    청소년 성가집 편집위원(1995년) 생활성가연구소 소장 역임.
    현재 작은 예수회 음악담당. '신상옥과 형제들'로 음악활동.
    대표곡 / '임쓰신 가시관' '고인의 기도'
    '내발을 씻기신 예수' '그 큰 빛 주님되어' '영의 노래'등

 

 

신상옥(안드레아) 씨와 신상옥과형제들 약력



1) 신상옥씨 약력

*1964년 경기도 강화 출생

*1987년 서울 가톨릭 대학 신학부 졸업
(재학시절 낙산중창단을 하면서 임쓰신 가시관을 발표)


*1992년 수원 가톨릭 대학 대학원 졸업
(재학시절 갓등중창단을 하면서 내발을 씻기신 예수를 발표)


*1993년 가톨릭 성가 그룹 '신상옥과 형제들' 창단하여
 현재까지 전국의본당
(약 300여개의 본당),교회행사, 각종이벤트에서 2001년 8월 현재까지 1200여회의 공연과 고인의기도, 나의 하느님, 사랑한다는말은,청소년미사곡 등 17장의 성가앨범 약 250여곡을 발표함


*1994년 주교회의에 의뢰로 청소년성가편집을 맡음

*1995년 PBC 라디오 '사랑의 노래 찬미의 노래'를 98년까지 진행함

*1998년 생활음악연구소에 소장으로 역임하면서 가톨릭교회내의 생활성가보급과 성가문화의 저변을 넓히는데에 최선을 다하고있으면서 기획앨범"그때가이르자"공동체다시부르기""신상옥과신학생묵상곡"등 3장의 앨범 40여곡의 성가를 발표함과 아울러 생활음악연구소의 지도신부이면서 책임자인 박유진신부님의 헌신적인 노력과함께 음향,조명,영상,녹음실,기획등 공연의 제반시설등을 갖추어 통합적이고 기동성있는 공연과 음악미사,음악피정,인터넷방송등 각종교회행사를 원활하게 수행하고 있다.

 

 



*신상옥과형제들(1992년---현재까지)

가톨릭성가밴드로서 리드싱어인 신상옥씨와 그의동생 신상훈씨 그리고 형님인 신상민씨 여동생 신윤경씨가 창단 당시 함께 했다고해서 이름을 지은게 그 유래

1992년부터 지금까지 창단멤버인 유승훈씨(생활성가가수,무필미디어대표)를 비롯하여 약 30여명의 멤버가 거쳐가면서 교회내의 성가공연과 창작생활성가,복음성가등 여러작품을 노래하고 각종 방송행사,교회순회공연,음악피정등

청소년 성인할것없이 그들을 원하는곳이면 항상 다니면서왕성한 성가음악활동을 벌이고 있다, 1998년연이후 현재까지 생활음악연구소의 전속음악단으로서 순회공연,미사와함께하는음악피정,정기생활성가미사를 봉헌하며 활동중에 있다.




###역대 신상옥과형제들 명단 #####

신상옥,유승훈,신상훈,홍성락,신윤경,전희준,최정근,이근상,최선영,신수산나,조은아,박수진(이상 1993년창단공연)

신상민,유정희,최선미,이양신,박성호,박경훈,정명숙,조현준(1994년이후)

금동철,인명금,최훈규,박상철,유수진.이지은.이진영,김진(1995년이후)

정경아,정철,남경진,이견호,홍석현,김지수(최근)



=신상옥과 형제들이 부른 대표곡=

*임쓰신가시관,내발을씻으신예수,고인의기도,그때가이르자,고통의길주님의길,살아계신주,산상교훈(이상 신상옥)

*소망,십자가바라보면서,서울역,모든형제들에게(이상 유승훈)

*주님만날그날까지,행복도당신께로부터,주님저하늘펼치시고(이상 신상민)

*사랑한다는말은,어머니,누군가널위해기도하네,(이상 신윤경)

*대영광송,그밤에,비탄의노래,함께하리,미사곡,소풍,하늘에서와같이땅에서도,영원한우정(합창곡)

*신상옥과유승훈씨가 함께부른곡;늘그렇게,주님계신곳어디나.비가오네



#현재 신상옥과형제들멤버

신상옥;리드싱어  신상훈;드럼과 싱어  정철;베이스기타

정경아;신디싸이저  이견호;일레트릭 기타  김지수;베이스,어코스틱기타

남경진(일렉기타) 홍석현(드럼) 코러스 : 생활성가찬미단, YCL



**신상옥과형제들의 관련앨범***

**신상옥과형제들과 관련된 창작앨범***

1993년 창단앨범"그큰빛주님되어";고인의기도,나의하느님,사랑한다는말은,그밤에

1994년 창작생활성가 "다시보는세상";하느님내주시여,십자가바라보며서,소나무,맨드라미

1994년 신상옥미사곡1"우리들의미사 하느님의미사"

1995년 창작생활성가"눈물보단웃음이";주님계신곳어디나,주님은나의노래,아름다운이밤에

1996년 창작생활성가"늘그렇게";소망,꿈을잃은아이에게,주님을찬양해,하늘에서와같이땅에서도

1997년 신상옥청소년미사곡2"나는거닐리라";하느님의어린양,주님의기도,주님께감사하라

1999년 대희년옴니버스앨범"은총의대희년";당신웃음닮고파,이천년의기쁨이여,대희년의노래

2000년 신상옥기획앨범"그때가이르자"어머니,주님만날그날까지,서울역,비탄의노래,빈무덤

2001년 공동체다시부르기,박성구신상옥의영의노래;주님은나의별,빈그릇,찍었어찍혔지




****신상옥과형제들이부른 그밖의성가 앨범****

1993년 "왜날사랑하나" ;누군가널위해기도하네,비가오네,날마다숨쉬는순간마다,님이여받아주소서

1994년 "살아계신주";좁은길을주와함께걸으며,,주님을의지합니다,오주없인살수없네,기도

1994년 가톨릭성가모음"주를따르리"주님은우리사랑하셨네.주님은저하늘펼치시고,,주님과나는

1995년 원선오신부창작곡모음"당신을만났을 때"사랑이없으면,네마음을다하고,별과눈물

1996년 성탄캐롤송 경사롭다,은종,화이트크리스마스,성탄전야,징글벨





***신상옥과형제들이 관련된 성가 앨범****

1997년 낙산중창단 "코이노니아"편곡,연주

1997년 갓등중창단"그나라가임하도록"편곡,연주

2000년 사랑의씨튼수녀회"외쳐라지붕위에서"작곡,편곡,연주

외쳐라지붕위에서,주님너그러우심이,성모찬가,여기있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