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일:5월30일
St. JOAN of Arc
St. Joanna ad Arc, V Born:6 January 1412 at Greux-Domremy, Lorraine, France
일명 오를레앙(Orleans)의 처녀로 불리는 성녀 잔 다르크(아르크의 요안나, Joanna Arcensis)는 당시 동레미는 영국군의 침략으로 많은 피해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열심했던 그녀는 1425년 13세가 될 무렵에 대천사 미카엘(Michael, 9월 29일)이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11월 25일)와 성녀 마르가리타(Margaret, 7월 20일)와 함께 나타나 나아가 오를레앙을 점령하고 있던 영국 군대를 몰아내라는 초자연적인 ‘음성’을 들었다. 그 ‘음성’의 지시에 따라
1428년 5월에 그녀는 샤를 7세(Charles VII)를 도와 부르고뉴(Bourgogne)가 영국과 동맹을 맺음으로 인해 내전으로 분열된 프랑스를 국왕의 통치 아래 하나가 되도록 하는 것이 프랑스를 위해 싸울 수 있는 허락을 요청하였으나,
그러나 그녀의 예언대로 샤를 7세의 상황은 더욱 불리해져, 1428년 10월 12일 그의 거점 지역인 오를레앙이 포위되었다.
1429년 프랑스군이 오를레앙 교외의 헤링 전투에서 영국군에 의해 패배하자 그녀는 3월 시농(Chinon)에 피신해 있던 샤를 7세를 찾아갔다.
그로 하여금 자신의 사명을 인정하게끔 하여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군사 작전에 나서기 전 푸아티에(Poitiers)로 가서 주교와 학자들 앞에서 최종적인 심문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그 ‘음성’은 사실로 인정되었고, 그녀의 주장에서 이단이나 미신적인 요소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받았다. 그녀를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흰 갑옷을 입고 전투에 참가한 그녀는 1429년 5월 7일 오를레앙에 입성하고 5월 8일에 영국군을 퇴각시킴으로써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마침내 1429년 7월 17일 샤를 7세는 랭스(Reims)에서 대관식을 올리게 되었고, 그때부터 왕은 더욱 방자해져서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독자적으로 군대를 모으고 활동하였고 자신이 들은 계시가 마귀의 짓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사기극을 벌인 당시의 지도자들은 그녀를 끝내 화형에 처하기로 결정하고,
교황 칼리스투스 3세(Callistus III)는 그녀에 대한 새로운 조사 위원회를 설치해서 조사한 결과, 무효화하는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그녀의 명예 역시 복권되었다. 교황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시복되었고, 그녀는 프랑스 제2의 수호성인이다.
참고자료
프랑스 동레미의 시골 농부인 쟈크 다크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다섯 자녀의 막내이나, 어려서부터 열심하였다.
13세 때에 그녀는 처음으로 초자연적 환시를 보았는데, 밝은 빛이 내리 비치는 중에 신비스런 목소리를 들었다고 묘사하였다.
세월이 감에 따라, 그 목소리는 성 미카엘, 성녀 가타리나 그리고 성녀 마르가리따의 소리라고 확신하게 되었고,
처음에는 프랑스군 사령관인 로베르 드 보드리꾸르가 비웃었으나,
이때 사령관은 그녀를 도팽에게 보냈는데,
그녀는 그가 못된 인물이줄 알았으나, 계시에 따라 그에게 순종하였고,
그러나 프와티에의 신학자들은 그녀가 이단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였으나,
그녀는 흰 갑옷을 입고서 프랑스군에 최초의 승리를 안겨주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1429년, 챨스가 라임스에서 챨스 7세로 대관할 때 그녀는 왕 옆자리에 앉았으나,
그녀는 독자적으로 군대를 모으고 활동하다가,
그녀는 자신을 이단으로 모는 정치와 종교 지도자들 틈새에서 자신의 환시가 마귀의 짓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사기극을 벌인 당시의 지도자들은 그녀를 끝내 화형에 처하기로 결정하고,
교황 칼리스토 3세(1455.4.8;4.20-1458.8.6)가 그녀의 무죄를 선언하였고,
그는 프랑스의 제 2의 수호성인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미카엘 대천사 축일:9월29일
성교회의 수많은 성녀중에서 특별히 유명한 성녀이다.
태생지 프랑스에서는 "조국의 성녀" 라고 부른다.
성녀는 1412년 1월6일 프랑스 동부 무조강가의 돔레미 마을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당시 프랑스는 백년전쟁으로 국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영국군의 점령으로 프랑스 영토는 모두 함락당하는 순간에 이르렀다.
그때에 요안나는 20세였다.
어느날 자기 집 뜰 앞마당에 있을 때 갑자기 큰 광채가 보이면서 하느님의 소리가 들렸다.
"조국을 구하라. 성당에 나가라"
"이는 하느님의 뜻이다. 순명하여라"
하고 일러주었고 또한 성녀 가타리나와 성녀 마르가리타가 자주 발현해서 요안나를 위로하며 격려하였다.
요안나의 사명은 오를레안의 성을 적군의 포위에서 구출할것과 국왕 카를로 6세를 계승할 젊은 태자를 렌스에 인도하여
성녀는 국왕과 신하의 불신과 백성들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대한 깊은 신뢰와 신앙으로
마침내는 영국군의 포로가 되어 온갖 수모와 고난 끝에 화형을 받게 된다.
1920년 교황 베네딕도에게 시성식을 갖게 되었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잔다르크 즉 아르크의 요안나는 교회의 많은 성인 중에서도 특별히 유명한 성녀이다.
그의 태생지 프랑스에서는 가끔 이 절세의 여걸을 조국의 성녀라고 부르며 언제나 그 나라의 자랑으로 삼고 있다.
성녀는 1412년 1월 6일 프랑스의 동북 뮤즈 강가에 있는 동레미하는 한 마을에서 어느 농가의 넷째 딸로서 태어났다.
소박한 부모는 땀을 흘리며 노동함을 함으로써 간신히 자녀들을 양육했다.
그 당시는 마침 백년전쟁이 일어나 프랑스는 커다란 국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적인 영국군은 아침에 요새 하나를 점령하고 저녁에는 성 하나를 함락시키는 식으로 점차 침략의 손을 폈고 나라의 운명은 마치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았으나 구원은 바야흐로 도래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구원을 가져오게 한 이야말로 순결하고도 경건한 한 소녀 요안나였던 것이다.
1424년 요안나가 20세 때의 일이다.
그녀가 자기집의 뒷마당에 있노라니까 갑자기 커다란 광채가 보이고 그와 동시에
"요안나야, 점잖고 신심을 두텁게 하고 교회에 가보아라"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놀라며 무서워 떨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세 번이나 있은 다음 그녀는 그 소리의 주인공이 성 미카엘 대천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천사는 또한 "그대는 이 국난의 시기에 있어서 일어나 조국을 원수의 손에서 구할 사명을 지니고 있다" 하고 말했다.
요안나가 근심하며 "저에게는 도저히 그러한 힘이 없습니다.
첫째 그러한 것을 듣기만 해도 무서울 지경입니다..."
하고 말하니 미카엘 대천사는
하고 대답했다.
또 거기에 두 동정녀도 나타나서 번갈아 그녀에게 힘을 돋우어 주는 것이었다.
이는 성녀 가타리나와 성녀 마르가리타였는데, 이 두 분은 그후도 자주 나타나서 요안나를 격려했다.
요안나는 될수 있는 데까지 그들을 본받으려고 우선 동정 서원을 발하고,
즉 그녀는 소녀들이 하는 오락을 멀리하고 종종 묵상하며 현세의 사람이나 물건에 애착을 단절하려고 힘쓰고 자주 기도하고 성사를 받았던 것이다.
그녀가 하느님께 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그로부터 4년 뒤인 1428년 5월의 일이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어떠한 장애가 있어도 결코 주저하는 바가 없었다.
그녀의 임무는 우선 오를레앙의 성을 적군의 포위에서 구출하고, 부왕 가롤로 6세의 뒤를 이은 젊은 태자를 라임스에 인도해 대관식을 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 때문에 그녀는 무엇보다고 먼저 시논에 있는 태자를 알현하고 ’미친 자’라고 그녀를 여러가지로 저주하며 욕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열심히 설득을 시키며 말 한 필과 부하 수명을 얻어 시논을 향해 출발했다.
도중에서의 위험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리하여 요안나는 태자의 궁전에 들어가서
죄송하오나 사람을 물리칠 수 없습니까?"
하고 말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녀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태자는 여러가지로 질문해 본 결과 명백히 대답하는 그녀의 태도에 침범할 수 없는 위엄과 확신이 보였으므로 그녀를 오를레앙에 파견하기로 했던 것이다.
이같이 당지(當地)로 가게 된 요안나는 백성들의 환영을 받게 되었다.
오를레앙은 이미 오랫동안 적군의 포위를 받고 함락은 거의 시간 문제였던 것이다.
또한 아주 젊은 소녀 요안나가 이러한 위기에 처하여 군을 진두 지휘 하는데 있어서 백전연마의 노장군 못지않은 솜씨를 목격하자
장군들 중에는 요안나의 구국의 사명을 의심하여 그녀를 질투하며 갖은 방법으로 방해하려고 한 자도 있었다.
그러나 백성과 군인들은 그녀를 맞이하여 사기가 높아졌다.
요안나는 우선 군기(軍紀)를 엄수케 하고, 아울러 장병 일동에게 고해와 성체 성사를 받도록 명했다.
그리고 나서 적군을 향해 진격을 개시했는데 거기에 참가한 군인은 다만 고해 성사로 죄의 더러움을 씻은 이들 뿐이었다.
요안나는 몸에 백색의 갑옷을 두르고 쥐색의 말을 타고 오른손에 검을 잡고 왼손에는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기록한 기를 들고 언제나 진두에 서서 지휘했는데, 삽시간에 오를레앙의 포위를 해제케 하고
그러나 태자는 연약한 처녀의 훌륭한 공훈을 시기하는 중신들이 자꾸 붙잡으므로 요안나의 말을 따르기를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요안나는 태자를 재촉해 부하 장병과 더불어 그를 모시고 적군의 수중에 있는 라임스를 향해 떠났다.
적군은 요안나가 접근하자마자 놀라 당황하며 도주하여 라임스 시의 문은 즉각 태자를 맞이하기 위해 열려졌던 것이다.
이튿날 태자는 그 시의 주교좌 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가롤로 7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때 요안나는 전의 거룩한 기를 한손에 들고 줄곧 왕 곁에 있었으나, 식이 끝나자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기쁜 눈물을 흘리며 "국왕 폐하, 이것으로 하느님의 뜻은 온전히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오를레앙의 위기를 구출할 것과 폐하를 이곳에 모시고 대관식을 거행하여 이 두 가지를 명하신 것이었습니다." 하고 말했다.
이를 보고, 들은 군중들도 저절로 그녀의 심중을 알아주는 듯이 다같이 감격의 눈물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요안나의 사명은 이제는 끝났다.
그녀는 사람들이 만류하는 대로 그저 군중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녀의 행운은 지나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가련하게도 영국군의 손에 체포되어 이단자, 마술사라는 누명까지 씌워져 마침내 고문까지 받았다.
이렇게 포로로 있기를 4개월, 허무한 풍설로 말미암아 그녀를 화형에 처한다는 선고가 내려졌으나 일체를 하느님의 성심께 의탁하고 태연한 빛으로 형장에 나아갔다.
그녀의 고결하고도 가련한 태도에는 무지한 형리까지도 눈물을 자아냈다고 한다.
벌써 그녀를 둘러싼 장작더미에는 불이 질러졌다.
활활 타오르는 화염, 하늘을 덮는 검은 연기, 그속에서 요안나가 부르짖은 최후의 말은 ’예수!"라는 한 마디였다.
그리고 영국군의 한 병사는 그녀가 숨이 끊어졌을 순간 흰비둘기 한마리가 불속에서 훨훨 날아
그 진부는 어떻든 간에 그녀의 순결한 영혼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안나가 귀천한 때는 1431년 5월 30일이고, 그녀의 나이 겨우 20세였다.
그녀는 1920년 교황 베네딕토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제2의 수호 성인으로 기념제는 매년 조국 프랑스에서
(대구대교구홈에서)
전쟁
잔다르크로 더 잘 알려진 요안나는 14살 때 대천사 성 미카엘과 알렉산드리아의 가타리나, 성인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모습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16살 때 전쟁에 참가해 오를레앙을 구해 내고 황태자를 옹립해야 한다는 소명을 느꼈으며 놀랍게도 그것을 해냈다.
그러나 결국 체포되어 영국으로 압송되어 갔고 거기서 화형당했다.
우리도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라는 내면의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그 소리는 작고 조용하지만 내면의 소리가 요구하는 것은 엄청난 세력과의 전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내면의 소리를 무시하곤 한다.
잔다르크도 그 소리를 외면하려고 했다.
그는 말을 탈 줄도 몰랐고 싸울 줄은 더더욱 몰랐기 때문에 군대를 이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하자 이런 소리가 들려 왔다.
“하느님이 친히 너와 그 군대를 지휘하실 것이다.”
우리는 관료주의와 억압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내면의 소리를 듣고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항변하면서 애써 외면하려고 한다.
거대한 힘에 맞서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소리가 옳다면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이런 확신을 가진다면 잔다르크처럼 깃발을 들고 전진할 용기가 우리에게도 솟아오르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의 힘으로 잘못된 사회 구조를 바꿀 수 있을까?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내가 맡은 일을 잘 수행하겠다.
(카리타스수녀회홈에서)
*성 미카엘 대천사 축일:9월29일
미카엘은 ’누가 하느님과 같으냐?’ 란 뜻이다.
미카엘 대천사는 교회가 전례에서 공경하는 세 분의 천사 중의 한명이다 (가브리엘, 라파엘, 미카엘).
그는 구약에서도 2번이나 나타났고(다니엘 10,13 이하;12,1), 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보호자, 특히임종자들의 수호자로 나타난다. 서방교회로 확산되었고, 교황 젤라시오의 재임기간에(492-96) 성 미카엘 대천사 축일은 로마의 살레리아노가에 세워진 미카엘 대성당 봉헌 기념일이고,
가타리나는 ’순수한’ 이란 뜻이다.
310년경 임종. 동정 순교자.
전설에 따르면, 가타리나는 알렉산드리아의 상류 가정 충신으로 학식이 뛰어난 미모였다고 한다. 이 놀랍고 뛰어난 논쟁으로 말미암아 50여명의 이방인 철학자들이
그녀의 독방에는 비둘기들이 음식을 날라 주었으며, 그리스도께서 발현하여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고 한다. 그녀는 큰 못을 박은 바퀴에 의한 고문을 당하였지만 전혀 상처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구경꾼 여러 명은 그 바퀴에서 튕겨나온 못에 의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그중에서 2백여 명이 개종하였고, 곧 참수당하였다. 이때 그녀를 덮었던 수건에는 피가 아니라 우유가 묻어나왔다고 한다. 그녀의 시신은 시나이 산으로 옮겨졌으며(천사에 의하여), 이곳에 정교회 수도원이 세워졌다. 가타리나는 쟌다크가 들은 신비스런 목소리의 주인공 중의 한 분이고, 철학자, 처녀 그리고 설교가들의 수호성인이다.
마르가리타는 라틴어로 ’진주, 보석’ 이란 뜻이다.
그녀는 원래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살던 어느 이교 사제의 딸이었으나, 어느 크리스챤 유모 밑에서 자라났다. 집을 나와서 자기 유모와 함께 양을 치며 살았다.
그러나 그 지방의 장관인 올리브리우스가 우연히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와 높은 지식을 보고는,
그녀는 한발자욱도 움직이지 않자, 이윽고 크리스챤이란 죄목으로 투옥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용으로 변한 사탄의 공격을 받아 곤경에 몰렸을 때, 항상 품고 다니던 십자가로써 극적으로 퇴치하였다. 마음으로 크리스챤이 될 각오를 새롭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따름이었다. 실제로 그녀의 죽음은 그 지방에 수많은 개종자를 낳았던 것이다. 로마 순교록에는 "위대한 순교자 마리나" 라고 기술한 뒤에 마르가리따의 행적이 나온다. 그러나 마르가리타가 보편적으로 알려진 이름이며, 쟌다크에게 계시를 준 성녀이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
'수호성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0) | 2013.05.29 |
---|---|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0) | 2010.06.23 |
리마의 성녀 로사 동정 (0) | 2010.06.23 |
성 마르티노 1세 교황 순교자 (0) | 2010.06.22 |
성 요한 세례자 (0) | 2010.06.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