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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탓이오"라고 하기 전에는...

Joannes 2013. 3. 31. 22:05

 

 

 

나라가 이 꼴인게 내 탓입니다.

김동길

 

 

여러 해 전에 천주교회에서 시작한

작은 사회운동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잘못부터 깨달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스스로 “내 탓이오”라고 자기의 가슴을 치자는 뜻이었을 겁니다.

 

일이 잘못되면 사람마다 “네 탓이오”라며

상대방을 향해 삿대질을 하기가 일쑤인 나라에서

천주교회는 온 국민에게 일침을 가하며

“왜 네 잘못은 깨닫지 못하고 남을 비난하고 원망하느냐”고

타일러 준 것이었습니다.

한동안 “내 탓이오”라는 네 글자가 적힌 스티커도 만들어져

자기의 자가용 창문 유리에 붙이고 다니는 ‘신자들’을

길을 가다가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훌륭한 표어와 신성한 국민운동이

흐지부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스티커를 구입한 선남선녀들이

그 표어를 부착하는 장소 선택을 잘못한 것입니다.

 

그 스티커는 마땅히

운전대 앞 유리창에 붙어 있어야 마땅했는데

그만 차체 뒷 유리창에 부착되어 뒤에서 운전하고 따라오는

다른 운전자들을 화나게 하였습니다.

 

앞차가 왜 그런지 꼴 보기 싫은 뒷차 운전자는

“그래 이놈아 네 탓이다”라며

앞차 운전자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앞차 운전자가 자기가 운전하며 늘 볼 수 있도록

운전대 앞에 붙이고 날마다 시간마다

“내 탓이오”라고 했어야 옳은데

뒷차 운전자가 보고 “내 탓이오”라고 하게 하려다

실패한 운동이라고 여겨집니다.

 

나라가 이 꼴인게 내 탓입니다.

 

 

김동길

www.kimdonggill.com

 

[ 2013-03-24, 15:54 ]

 

 

우리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만났던 울타리인 천주교는

영적인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국민계몽운동을 많이 하고 있었지요?

 

요즘에는 양심회복운동 또 그전에는

‘내 탓이오!’ 스티커를 만들어서 붙이고 다녔습니다.

천주교신자들의 차에 하나씩 붙어있었던 ‘내 탓이오!’

여러분들 머릿속으로 ‘내’자와 ‘네’자를 그려보십시오.

뭐가 차이가 있습니까?

 

‘ㄴ’에 ‘ㅏ’에 ‘ㅣ’가 붙으면 ‘내’가 되지요?

‘ㄴ’ 에 ‘ㅓ’ ‘ㅣ’가 붙으면 ‘네’가 되지요?

 

이 점 하나가 안으로 들어갔느냐, 밖으로 향하느냐에 따라서

‘내’ 가 될 수도 있고 ‘네’ 가 될 수도 있다!

 

‘내 탓이오!’

스티커를 우리 신자들이 붙이고 다닐 때 저는 어느 날

신자들의 차 뒤 유리창에

‘내 탓이오!’라고 붙어있는 것을 보면서

‘이건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운전하는 지가 앞에다 붙이고

생각날 때마다 내 탓이라고 생각해야 되는데

왜 뒤에 사람보고

내 탓이라고 그걸 가르쳐주고 있느냐?

그걸 떼어가지고 제가 볼 수 있게

차 앞에다 붙이고 다녔습니다.

 

‘내 탓이오!’ 운동은 남을 회개시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회개하는 겁니다.

 

'네 탓' 은 하기가 쉽지만

'내 탓!' 하기는 어렵습니다.

 

미사 때 고백의 기도를 할 때마다

우리는 가슴을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칩니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마지막으로 그것도 아주 큰 탓이오.

그러면서 속으로

‘니 놈 탓이오!’ ‘내 남편 탓이오!’

‘내가 이렇게 망가진 것은 내 옆에 있는 사람 탓이요!’

말하는 것은 쉽지만 그것을 가슴으로 끌어내리고

표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겁니다.

 

지금도 시골 동네마다 대동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감곡성당도 왕장리에 속해있는데

왕장리 대동계가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 돼지를 잡고 잔치를 하며

일 년 동안 우리 마을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서로 의논을 합니다.

 

어느 동네에 마을 사람들 숫자가 자꾸 줄어들고

예전처럼 가깝지 않아서‘이러다 우리 마을 깨지겠다...

우리도 옛날처럼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서

일 년에 한 번씩은 대동계를 하자.

돼지는 공동으로 잡고,

일 년 동안 집집마다 정성들여

술을 좀 준비해서 그날 가지고 오자.’

이윽고 동네 잔칫날이 다가왔습니다.

 

사람들은 아주 흥겨운 마음으로

손에는 술병을 하나씩 들고 와서

잔치하는 집 마당 한가운데 있는 큰 독에다가 부었더니

술독이 하나 가득 찼습니다.

 

잔치가 시작되자 술을 퍼서 한잔씩 다 돌린 다음

대동계회장이 잔을 들어서 우리 마을의 평화를 위해서

한잔씩 기분 좋게 마십시다.

‘자 위하여~’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사람들이 마신 것은 전부 다 맹물이었습니다.

이유는 뭡니까?

‘남들이 다 술을 가지고 올 텐데....

나 하나쯤 맹물을 담아 간다고 해서 표시가 나겠는가?’

 

그곳에 술을 가지고 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던 겁니다.

 

그날 밥이 콧구멍으로 들어가는지

귓구멍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서로가 부끄러움 속에서 도망치듯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 이제부터는

나 하나쯤 이라고 하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서

나 하나만이라도 하는 생각을 가지고 살자.’

‘우리 동네사람들이 다 거짓말을 시켜도

나만큼은 진실 되게 살자.’

 

‘우리 동네사람들이 엄한 사람들을 가지고

입으로 험담을 하고 다녀도

나만큼은 입을 다물고 지퍼를 채우고 살리라.’

 

진실 되게 살고자하는 마음을 먹은 이 동네사람들은

힘을 합쳐서 살기 좋은 동네를 이루었다는 얘기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밀알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지만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주님께서 믿는 자들인 우리들에게

삭막하고 썩어가는 이 세상에서

하나의 밀알이 되라고 명하십니다.

 

권고하는 것과 명하는 것은 차이가 큽니다.

 

썩은 밀알의 삶은

모든 것을 순조롭고 행복하게 할 수 있지만

썩지 않고 사는 것이

우리 신자들에게 늘 문제가 있습니다.

 

죽어야 산다는 말씀도 알고 있고,

오리가자는 사람에게 십리를 가주라는 말도 알고 있고,

오른뺨을 치거든 왼 뺨을 대주라고 하는

성경구절은 전부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왜 그토록 힘이 들고 한평생 시도조차 못해보는 걸까?

 

크리스천의 영성은

한마디로 밀알의 영성이며 썩는 영성입니다.

움켜쥐는 영성이 아니라 포기하는 영성입니다.

 

크리스천의 영성은 바보의 영성이요,

크리스천의 영성은 걸레의 영성이요,

크리스천의 영성은

불붙은 탄이 되어 밑으로 내려가는 영성이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밀알의 영성과 그 뜻이 통할 겁니다.

 

 

첫 번째가 바보의 영성입니다.

 

예수님은 큰 바보처럼 사셨기에 우리 신자들은

저 큰 바보를 주님이라고 부르고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들도 분명히 예수님처럼 바보처럼 살아야 되지만....

세상에는 바보 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끔 성당에서 바보를 만나면

그렇게 행복하고 기쁩니다.

 

다 예수님보다 똑똑한 사람들만 있는 것이

지금이 아니겠는가!

 

바보들만 모여 있는 성당에는

예비자들이 꾸역꾸역 모여듭니다.

그 바보들이 자기 동네에 가서 바보처럼...

세상의 법과는 반대로 삽니다.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그 바보처럼 사는 천주교신자들을 보고

‘참, 요즘에 저렇게 사는 사람이 다 있네..

나도 종교를 갖는다면 천주교를 나가야지.....’

하면서 바보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아무리 수십억원짜리 성당을

으리으리하게 지어 놓았다고 해도

그 안에는 똑똑한 사람끼리 수많은 파가 있어서

교회가 분열이 일어납니다.

 

사공이 많다보니까

본당사제는 사목을 할 재간이 없습니다.

 

그저 손가락질을 하면서 ‘니 탓이요...니 탓이요!’

서로가 상처를 주고 피를 흘리고 살아갑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은 쳐다볼 생각도 안하고

성당을 좌지우지~

자기 전유물처럼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장소로 알고

외부사람이 들어오면 가차 없이 치고....

텃세를 부리며 스스로 똑똑한 척 하지만

얼마나 멍청입니까?

 

그래서 크리스천의 첫 번째 영성이며 밀알의 영성입니다.

썩어야 되는 영성입니다.

 

 

크리스천의 영성의 두 번째는 걸레의 영성입니다.

 

우리 주님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의 성혈로 세상의 모든

더러운 죄를 다 닦아 주시고 묵묵히 저렇게 계십니다.

 

예수님만큼 하실 말씀이 많으신 분이 어디 계시겠습니까?

우리 신자들도 우리 주님을 닮아서

작은 걸레로 살아야 합니다.

 

 

걸레의 존재 이유는

더러운 것 닦아주고 쓰고 난 다음에

자기를 아무렇게나 대해도

불평하지 않는 것이 걸레의 삶입니다.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언제든지 저 기쁘게 쓰십시오!’

 

걸레의 삶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오늘 미사에 오면서 주차장에 내려서

주차장 한 번 둘러보았습니까?

 

성당에 오시면서 쓰레기 같은 것 보인 적 없습니까?

걸레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성당 입구가 더러우면 빗자루 가져다가 쓰는 것이고...

화장실 들어갔더니 화장실이 더럽다...하면

청소도구 가지고 물 뿌리고 청소해서

뒷사람 기분 좋게 하고 나오는 것이 걸레의 삶입니다.

 

제가 어느 본당에 부임을 해서 첫미사를 드리고

제의방을 다 둘러보느라고 좀 늦게 성당으로 나갔습니다.

 

‘신자들이 당연히 없겠지..... ’

하면서 제의실 문을 열고 성당으로 나오려다가

다시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열려진 문틈으로 성당 안을 보니까

어느 자매 하나가

뭘 열심히 가방에 주워 담고 있었어요.

 

‘뭘 저렇게 열심히 담고 있나~~’ 보니까

신자들이 미사 보면서 꾸깃꾸깃 해놓고 간 주보를

열심히 자기 가방 안에 넣어서

누가 볼까 도망치듯이 나갔습니다.

 

저는 제의실 안에서 그 자매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얼마나 먹고 살기가 힘들면

신자들이 놓고 간 주보를 모아 폐지로 팔러가나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지요.

사제관 2층에서 보니까 저녁 미사 한 시간 전에

그 자매가 성당으로 다시 들어갔어요.

 

쫓아 들어가 보았더니 그 자매는

가방에서 교우들이 구겨 버리고 간 주보를

다리미질해서 깨끗한 새 주보로 만들어

주보 쌓아놓은 곳에 ‘착~’ 놓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매는 내가 그 성당에 7년 동안 근무하는 동안

7년 내내 매주 그 일을 했습니다.

저는 그 성당을 떠날 때 그 자매를 불러놓고

큰 상을 주었어요.

 

무슨 상?

 

5인용 밥상...거기에다가 4박 5일

제주도 성지순례 티켓이 든 봉투 하나를 더 넣어 주었어요.

누구라도 잠깐은 할 수 있겠지만

지속적으로 걸레의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사제인 제가 성당을 돌아다녀보면

쓰레기가 자꾸 눈에 띄어요.

사제인 나한테는 보이는데

왜 교우들 눈에는 쓰레기가 안 보일까요?

 

걸레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성당 안에 들어가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조금 일찍 와서 빗자루 들고

성당 앞마당이라도 쓰는 게 걸레의 삶입니다.

 

성당은 일주일에 한 번씩

여러분들이 대접받으러 오는 곳이 아닙니다.

 

바보가 되신 예수님을 만나서

‘바보처럼 살겠습니다....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십시오.’

주님이 사시는 이 성전이 이렇게 더러워서야 되겠습니까?

 

화장실 청소는 하는 사람만 하는 겁니까?

화장실 청소 돈 주고 사람 사서 하지 않습니다.

 

정말 오른 손이 하는 것

왼손이 모르게 하시는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일 벌려놓고 간 것

새벽에 일찍 와서 하는 분 다 따로 있습니다.

돈 받고 하는 게 아닙니다.

 

신자 생활 한평생 하면서

‘나는 성당 화장실청소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이건 아니올시다.

주님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썩은 밀알의 모습이 아닙니다.

 

요즘 도시 본당에서는 성당에서

“일 좀하자!” 하면

“일 할 시간이 없으니까 돈으로 내겠습니다.

내 일당 5만원...용역회사에서 사서 하십시오.”

어떤 사람은 아예 사람을 사서 보내기까지 합니다.

 

그건 아니지 않겠는가!

 

사람이 사는 방식은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거미와 같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것을 채우는 삶이 있고,

개미와 같이 자기 일에는 충실하지만

남에게는 전혀 신경을 안 쓰는 이기적인 자가 있고,

벌과 같이 자기 일에도 충실하고

남에게도 시선을 주며 같이 아파하는 삶이 있다고 합니다.

 

나는 이름이 천주교 신자고 세례명이 있고

주일마다 성체를 모신다고 하는 나는

과연 이 셋 중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스도가 원하는 삶은

바로 벌과 같이 사는 모습일 겁니다.

 

세상에서는 큰 밀알이 되어 썩음으로써

귀감이 되는 많은 의인들이 있습니다.

 

성당에는 발을 한 번도 들여놓지 않은

이방인이라고 하더라도

세례 받은 천주교 신자보다도

훨씬 더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꽃동네에 수많은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또 전국 여기저기에 익명의 크리스천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큰일을 할 수는 없지만

집에서 성가정을 이루는데

썩을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아내는 남편 앞에서

어떻게 썩어야 될지를 늘 묵상하십시오.

남편도 아내 앞에서

어떻게 썩을지를 묵상하십시오.

 

저도 교우들 앞에서 어떻게 썩어야

옳은 사제로 살아가는지 묵상합니다.

 

 

문제는

상대편에게만 썩기를 강요할 때 생겨납니다.

나 하나쯤은 맹물을 떠와도 될 거라고 하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은 분열을 가져옵니다.

 

 

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