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인천고등학교 발원지가 현 제물포고 자리라는데...

Joannes 2013. 3. 6. 17:33

 

 

 

 

인천고등학교 발원지가 현 제물포고 자리라는데...


 

인천고등학교의 전신이 인천상업학교라고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인천고등학교의 뿌리는 한 마디로 간단히 정리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이 얽히면서 좀 복잡합니다.

1950년 6월 20일 “인천고등학교”라는 학교 현판이
현재 제물포고등학교 강당 우측에 있던
당시 인천중학교 정문의 좌우 기둥에 나란히 걸리게 됩니다.  

제물포고등학교가 생기기 전의 일이지요.
 
3월도 9월도 아닌 6월 20일이 된 이유는 50년 3월 10일
교육법이 개정되면서 학기 시작이 9월에서 4월로 변경되었기 때문입니다.
 

미 군정 시절 시행하던 9월 새 학년 방식에서 예전에 쓰던
일본식 4월 새 학년 방식으로 변경한 것이지요.
 

49년 9월 새 학년을 시작한 학생들이 50년 5월에 마치고 6월에 새 학년에 시작해야
51년 4월에
새 학년을 맞이할 수 있다는 계산으로 그랬던 것 같은데요.  

6월 새 학년 현상은 과도기에서 발생한 일시적인 것이지요.


인천에서는 전쟁의 여파로 52년 4월이 되어서야 새 학년 제도가 정착되었지만...
인천고 현판이 왜 현재 제물포고 자리에서 일생을 시작하였느냐구요?
 

교육법 개정안에는 3년제 고등학교도 새로 신설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6년제 인천중학교 길영희 교장이 인천중학교 부설로 인천고등학교를 급하게 만들어서
문리과 94명을 6월 20일 입학식을 가졌다고 합니다.
 

인천중학교 5-6학년은 그냥 인천중학교이고 인중 4학년만 인고가 된 셈이지요.
현재 제고 후관 건물이 인고의 첫 탄생지였지요.
 
인고 탄생 5일 만에 전쟁이 터지고 
6월 27일 인천중, 인천고 모두 무기휴교에 들어갑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많은 학생들이 인천으로 돌아 왔지만
인천중, 인천고 자리였던 자유공원 일대는 미군 야전병원으로 차출되고 
인천중학교 학생들은 신흥초등학교에 가서 더부살이 공부를 시작했고,
인천고 학생들은 인천상업중학교(현재 인천정보산업고등학교 자리)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됩니다.
 

인천중 5, 6학년도 인천고 1학년과 함께 갔기에
인천고와 인천중의 구분도 뚜렷하지 않았지요.
교실이 부족하여 선생님도 학생들도 정말 고생이 많았습니다.

1951년 11월 5일 인천중학교는 인천상업중학교 학생들을 받아서
3학년까지만 있는 중학교로 확정되고,
인천상업중학교는 학생이 없으니 학교명칭을 폐지하고
인천고 1학년 및 인중 5, 6학년 등 고학년 학생들을 받아
학교 간판도 “인천고등학교”로 바꾸어 달았습니다.

부산 전시정부 문교부의 지시였지요.  
저학년, 고학년을 모두 다른 곳으로 떠나 보내고
자체 건물 하나 없는 인천중학교로서도
언제까지나 인천고등학교를 안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인천상업중학교 교장으로 발령 받았던 이인관 교장은 중학생들 모두 보내 주고
고등학생을 대신 받아 순식간에 인천고등학교 교장으로 신분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1953년 11월 26일 인천중학교는
유엔군으로부터 학교 건물을 돌려받아 오랜만에 돌아오게 됩니다.  

인천중학교 길영희 교장은 1954년 제물포고등학교를 개교하여
전쟁으로 끊어진 고등학교의 꿈을 이어 갑니다.  

인천중학교 졸업생들이 제물포고등학교로 대부분 진학하는 바람에
전국 최고의 대학진학률이라는 화려한 명성은 인천고에서 제고로 넘어가게 됩니다.


지금은 전국이 고교 평준화가 되어
옛날의 명성들이 다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말았지만...

 
고교 평준화로 폐교했다가 21세기에 연수동에서
인천중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한 새 인천중학교는
 
자유공원 옛 인천중학교 역사를 물려받아 역사가 70년이 넘어 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졸업 횟수도 70회가 넘어 갔지요.

인천중학교로 흡수되면서 폐교한 인천상업중학교의 건물을 물려받은
인천고등학교는
역사도 물려받아 인천고등학교 역사는 100년이 넘어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졸업 횟수도 100회가 넘어 갔지요.  
이것은 인천고 출신들이 갖는 긍지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길영희 교장은 인천고등학교 현판을 보따리에 싸서 제주도 피난갔을 때도 
항상 곁에 두고 있더라는 전설같은 증언이 있습니다.
 

이인관 교장은 정년퇴임 후에 서울에서 사립학교를 개교했는데
자신의 호를 따서 충암학원(충암중, 충암고)이라 했답니다.
 
참, 4월 신학기 시작이 1962년부터는 3월로 바뀌게 됩니다.
이런 역사들이 모두 묻혀 버리기 전에 기록으로 남겨두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잠깐 정리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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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문학박사 황재순(부개고등학교장/전 제고 교사-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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