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소공동체가 안 된다?

Joannes 2016. 12. 31. 16:27

 

 

 

평화를 빕니다!

오늘 2015223일부터 화정3동 소공동체 활성화를

대구대교구 2대리구장 박성대(요한) 주교대리 신부님의 글을

연재해드립니다.

 

현재 본당 소공동체를 하고 계시는 분들과

소공동체 모임을 갖고자 하시는 분들께 많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루카 13,34).

 

*소공동체가 안 된다?

 

몇 년 전, 대구대교구에서 소공동체 대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마침 서울대교구 정월기 신부님께서 소공동체에 대한 강의를 시작하면서

이런 질문을 하였다.

 

소공동체!’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뒷좌석에 계신 어느 신부님께서 안 된다!”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참가자들 모두가 일시에 큰 소리로 웃은 기억이 있다.

사실 맞는 대답이다. 소공동체는 잘 안 되고 있다.

 

한국천주교회에 소공동체가 도입된 지 20년이 되었고

대구대교구에서는 제1차 교구 시노드의 결론으로 소공동체를 도입하고,

본당의 모든 조직도 소공동체 정신에 따라 개편하기까지 하면서

10년을 거쳐 왔지만 소공동체 사목을 하는 본당은 거의 없다.

어느날 교구장이신 조환길 대주교님께서도 물으셨다.

 

왜 대구대교구에서 소공동체 확산이 안 됩니까?”

 

이 질문은 대주교님 혼자만의 질문이 아니다.

각교구 대부분의 사제들이나 신자들의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지금 대구대교구에서는 소공동체 사목이 안 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제와 신자들이

되지도 않는 소공동체를 붙들고 있을 이유가 무엇인가?”하고

소공동체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며

포기를 권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그렇다면 소공동체는 과연 미래 교회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말인가?

이쯤에서 소공동체 사목을 포기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인가?

과연 소공동체 사목은 실현 불가능한 것인가?

왜 그럴까?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소공동체가 안 되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그렇다면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지금의 교회가 소공동체를 받아들이기에

매우 어려운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공동체가 안 되고 어려운 것이 당연한지도 모른다.

소공동체가 잘 안 되는 현실을 보면서

먼저 예수님께서 하신 다음의 말씀을 소개하고 싶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루카 13,34-35)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셨지만 그들은 그 복음을 마다하였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말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 구세주이시며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이신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알아볼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편협한 율법주의에 젖어 있고 전통과 관습에 묶여있고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

라고 하신 말씀을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경직되어 있고,

귀와 눈이 멀어져 있었다.

그로 인해 결국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분을 죽이는 어처구니없는 죄를 짓게 된 것이다.

 

구약시대에 자신들이 누리는 기득권이나 특전에 연연해 한 나머지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에 눈을 뜨지 못한 것이다.

과거의 전통만을 고집한 나머지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당신이 한탄하시고 우신 예루살렘 성전에 제일 먼저 들어 가셔서

평소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분노를 터뜨리시고 예수님답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난폭한 모습을 보이시며 말씀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요한 2,19)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2)

 

지금의 교회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으려고 하지 않고

자꾸만 헌 부대에 담으려고 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마르 2,22) 답답한 마음이 앞선다.

 

주님!

성자께서 당신 이름으로 모인 사람 가운데

함께 계실 것을 약속 하였사오니,

성령의 빛으로 오늘 모인 저희로 하여금

진리와 사랑으로 저희 마음에 은총과 자비와 평화를

풍부히 내려 주심을 체험하게 하소서

완전한 일치이시며, 참된 사랑이신 주님!

오늘 이 구역, 반 모임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배우고

당신의 위대한 희생을 본받으며

당신의 자녀들로서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항구한 일치로 굳세어지게 하소서.

또한 저희가 서로 형제 된 기쁨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친교를 이루며 이웃에 봉사함으로써

당신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저희 안에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본당 공동체를 복음화 하는 것을 필자는

다니고 싶은 좋은 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다니고 싶은 좋은 성당이란 어떤 성당인가?

 

좋은 성당 이란 다니고 싶은 성당이라고 필자는

지금까지 말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어느 한 해는 소공동체 사목을 하면서 본당 사목 지침을

우리 성당, 좋은 성당이라고 정한 때가 있었다.

사제 생활 동안 필자를 가장 슬프게 만든 것은

저는 신부 때문에 이 성당을 떠납니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필자를 가장 기쁘게 한 것은

저는 신부님께서 저희 본당 주임신부라는 것이 참으로 행복합니다.”

고백을 들을 때였다.

 

실제로 본당은 주임사제의 역할에 따라 주일미사 참례자 수나

주일헌금이 달라진다.

물론 주일미사 참례자 수나 주일헌금 정도가 그 본당을 다니고 싶은

좋은 성당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우리 성당, 좋은 성당

소공동체 사목을 하는 이유는 결코 소공동체,

그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니다.

본당 공동체를 복음화 하는 것이 소공동체의 목적이다.

본당 공동체를 복음화 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함이다.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하여 교회를 먼저 복음화해야 하고

이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말하는 자기 복음화이다.

자기 복음화를 이루기 위하여 본당 공동체를 복음화해야 하는 것이

가장 필연적인 선결 과제이다.

 

그러나 그 성당이 복음화 되고 신자들이 열정과 생기를 느끼고

신바람 나는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 성당은

다니고 싶은 좋은 성당이 되면서

주일미사 참례자 수와 주일헌금이 증가하게 된다.

그리고 그 성당은 다니고 싶은 좋은 성당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다니고 싶은 좋은 성당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성당이 되어야 하는가?

소공동체를 하는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

 

즉 본당을 다니고 싶은 좋은 성당으로 만들기 위해서 소공동체를 한다.

그 말을 어려운 말로 복음화내지 새로운 복음화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복음화 된 성당을 일컫는데,

복음화 된 성당이란 어떤 성당을 말하는가?

필자는 앞에서 오늘의 우리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어불성설(語不成說)의 교회라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 교회를 어불성설의 교회가 되게 했단 말인가?

복음화는 교회의 여러 가지 어불성설의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다.

어불성설의 첫 번째가 바로 복음이 아닌 것을 복음으로’,

 

그리고 복음보다 훨씬 덜 중요한 것을

복음보다 더 중요하게사목하거나 가르치고

또한 신자들도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런 나머지 교회는 위기를 맞고 있다.

 

생각이 있고 의식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특히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것은

충격적이면서 심각한 사실이다.

그리고 냉담자가 교적상 신자들의 3분의 2 수준에 이르면서

교회는 자꾸만 고령화되어 가고 있다.

대구대교구 본당의 90% 가량이 고령화 본당이다.

이유는 복음에서 멀어진 교회,

혹은 말씀이 없는 교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정체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마르 7,7-13)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교회는 끊임없이 식별하여, 일부 관습들이 복음의 핵심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어떤 관습은 비록 오랜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음에도

이제는 예전과 똑같이 이해되지 않으며,

그 메시지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도 않습니다.

일부 관습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복음을 전하는 수단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이러한 것들을 재고하여야 합니다.”

(복음의 기쁨 43)

 

어불성설의 둘째 이유는 아직도 우리 교회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성직자 중심의 교회때문이다.

지금도 많은 성직자들이 이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해

성직자 중심의 교회에 발목이 잡혀 있다.

그래서 본당은 본당신부가 꽉 잡아야 한다는 전근대적인,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머물러 있는 사제들이 많아 보인다.

만일 교회가 성직자 중심의 교회가 되지 않으면

본당은 엉망이 되거나 황폐된다고 걱정하고 있는 사제들이 많아 보인다.

그러나 최근에 실시한 교황 방한 후속 심포지엄에서도

사제가 중심이 되어 모든 일을 다 하는 구조로는

교황님의 권고를 이행할 수 없다.

신자들도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교회가 방향을 제시하고,

그 방향으로 갈 때 생기는 문제들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가톨릭신문, 2014.11.2)

성직자 중심의 교회 체질을 개선하여

평신도의 의사결정권 확대가 필요함을 말했다.

 

하루 빨리 성직자 중심의 교회에서 벗어나

평신도 중심의 교회가 됨으로써

평신도들로 하여금 주인의식을 갖고 자신들이 결코

주임신부의 심부름꾼이나 보조자로 소극적이며

피동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미숙아 수준의 평신도가 아니라

사목의 동반자이며 복음화의 주역임을 깨닫고

평신도로서의 자발성을 찾아줘야 할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복음화의 가장 큰 숙제이다.

지금까지 연재해 오면서 소공동체가 안 되는 교회,

즉 어불성설의 교회의 모습을 여러 가지로 지적하면서

우리 교회가 소공동체를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심각한 병에 걸려있는

위기의 교회를 말하였다.

여전히 부족함과 아쉬움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열심히 읽어 주었고 많은 격려를 보내주었다.

그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이 글을 마감하면서 마지막으로 외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새로운 지평을 찾는 교회가 되었으면 하는

필자의 간절한 바람이다.

새로운 지평을 찾는 교회를 펴낸 배경민 신부는 저서에서 말했다.

 

시대적 요구 상황에 대처하도록 힘쓰면서,

교회는 지금까지의 선교관과 교회론을 보강하고,

성령의 참신하고 새로운 말씀과 인도하심에 귀 기울이고 따르며,

전통적으로 실행하여 오던 교회의 존재 역할의 지평을 새롭게 추구하고

확장시켜 가야 할 당위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교회는 지금까지의 존재 범주를 훨씬 넘어,

시대의 표징을 간파하면서,

새로운 지평과 경계를 찾아 가야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새로움에의 도전 정신을 보다 심도 있게

체득해야 함을 당면 과제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새로운 지평을 찾는 교회, 7)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태 9,17)

 

예수님의 첫 기적도 카나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기적이었다.

이는 내가 세상을 바꾸러 왔다.’는 예수님의 강력한 메시지이다.

그리고 성전으로 가셔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요한 2,19)고 말씀하시면서

새로운 지평을 열 것을 강력하게 주문하셨다.

소공동체는 미래의 새로운 교회됨의 유일한 답이 틀림없다.

레지오 마리애도 좋지만 미래 교회의 답이 되기에는

부족함과 한계가 있음을 솔직하고 정직하게 인정하면서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확신한다.

미래 교회의 새로운 비전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새 패러다임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 와 있다.

장래성이 없는 상품을 고집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소공동체로 교회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우리 성당을 다니고 싶은 좋은 성당으로 만들어야 한다!

친교의 교회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요한 2,19)

 

* 변화와 개혁 때문에 길을 잃을까봐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교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탄생하시면서 가르쳐주신 신비가 바로

육화(肉化)의 신비이다.

우리가 이 육화의 신비를 모르면 예수님을 알 수가 없다.

예수님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구원과 사랑의 신비도 알 수 없다.

이 신비는 우리 신앙생활에 대단히 중요한 신비이다.

이 육화의 신비를 담고 있는 말씀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이다.

이 말씀 속에 육화의 신비가 담겨져 있고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담겨있다.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 방식이 이 말씀 속에 담겨져 있다

그런데 이 육화의 신비가 바로 다름 아닌

변화를 말하고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변화는 엄청난 변화이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는 변화이며 하늘이 땅으로 변하는

천지개벽과 같은 변화이다.

그래서 새 하늘, 새 땅이 되는 새로운 창조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육화의 신비,

즉 변화의 신비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은 이 육화의 신비를 살아

이 세상에 그 육화의 신비를 실현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실천해야 할 막중한 사명,

곧 이 세상을 바꾸는 사명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복음적 요청이며 시대적 요청이다.

이러한 막중한 사명을 교회가 잊으면 절대로 안 된다.

이 사명을 잊지 않기 위하여 실현시켜야 할,

절대로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과제가 바로 육화를 사는 일이며

그것은 바로 변화를 사는 일이다.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시한 가장 중요한 주제는

‘Aggiornamento(현대 세계에로의 적응)’이다.

이 주제를 실현하기 위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자기 복음화라는 기막힌 말을 내놓았다.

성령의 위대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열렸던 20번의 공의회는 언제나 예외 없이

이단에 대한 단죄와 파문으로 일관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만은 일체의 단죄와 파문을 하지 않고

자기 복음화라는 기막힌 선물을 내놓았다.

놀라운 교회의 새로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자기 복음화는 바로 교회의 쇄신을 말하는 것이고

교회의 자기 반성과 회개를 말하는 것이고

이것은 바로 육화의 신비에서 비롯된 것이고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기 복음화자기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코닥의 관료주의에서 벗어나라.”이 말은 김관진 국방부 장관이 한 말이다.

세계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를 만든 131년 역사의 코닥은

필름 카메라 시장에 안주한 탓에 결국 회사가 파산했다.”고 말했다.

(2014.1.8. 동아)

개혁·개방 하지 않으면 중국 앞에는 오직 죽은 길밖에 없다.”

(2013.11.18. 조선)

이 말은 중국 국가 주석인 시진핑이 한 말이다.

 

현대의 시대적 특징은 변화이다.

변화하지 않으면

망하거나 죽는 길밖에 없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말이다.

교회도 예외일 수는 절대로 없다.

교회도 변하지 않으면 도태되거나 망하거나 죽는 길밖에 없다.

교회도 세상 속의 교회일 뿐

세상을 떠난, 세상 위에 군림하는 별개의 세계에 사는

예외적인 존재인양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교회도 이 시대적인 특징인 변화를 외면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만일 교회가 이 변화를 외면하거나 게을리 하면

교회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복음적 요구나 시대적인 요청을 거절하는 것과 같으며

설자리를 잃어 버리게 될 것이 틀림없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제일 처음으로 일으키신 기적이

카나의 혼인잔치(요한 2,1-12)이다.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첫 기적을 일으키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첫 기적을 통하여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주셨다.

그것은 내가 세상을 바꾸러 왔다."는 메시지이다.

따라서 우리 교회의사명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부르짖는 복음화는 다름 아닌 세상을 바꾸는 작업이다.

 

교회로서는 복음화의 기쁜 소식을 인류의 모든 계층에까지 전해주어,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라고 한 것과 같이

그 힘으로 인류를 내부로부터 변혁시켜 새롭게 하는 것이다.

교회로서 복음화 한다는 것은 단순히 보다 넓은 지역에서

혹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선교하는 것만이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계획에 배반되는 인간의 판단 기준,

가치관, 관심의 초점, 사상의 동향, 사상의 원천, 생활방식 등에

복음의 힘으로 영향을 미쳐 그것들을 역전시키고 바로잡는 것이다.”

(‘새로운 복음화개념 연구 및 사목적 모색, 서울대교구 사목국, 21)

 

한마디로 교회가 해야 할 복음화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을 복음화 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을

모두 천주교 신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세상 복음화는 세상을 바꾸는 일이며 이 세상을 살기 좋은 세상,

살고 싶은 세상으로 바꾸는 것이다.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은 2009년도 사목지침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로 정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신앙인들은 각자 생활의 증거와 말씀의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며,

그리고 교회는 스스로 끊임없이 변화와 쇄신의 길을 걸어갈 것을 촉구하였다.

(2009.12.6. 평화신문 참조)

 

다행히 새로 선출되신 교황께서 이 교회의 자기 복음화 내지

자기 변화를 강력히 촉구하셨다.

특히 최근에 발표하신 복음의 기쁨에서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가톨릭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그리시면서

교회의 자기 회개와 쇄신을 강조하셨다.

저는 선택적, 즉 교회의 관습, 관행, 시간과 계획, 언어와 구조 등

모든 것을 교회의 자기 보존이 아니라

현대 세계의 복음화에 적절하도록 변화시킬 수 있는 선교적 열정을 꿈꿉니다.

(2013.12.8. 가톨릭신문)라고 말씀하셨고,

자신의 안위만을 신경 쓰느라 폐쇄적인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 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더 좋아한다.

교회는 쇄신과 변화 때문에 길을 잃을까봐걱정하지 말고,

잘못된 안도감을 주는 구조 안에,

가혹하게 남을 판단하게 만드는 규율들 안에, 그리고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습관들 안에 갇혀 있는 것을 더 두려워해야 한다.”

(같은 신문)고 말씀하셨다.

또한 교황께서는 복음 본연의 참신함을 되찾자고 초대하시며

새로운 길창조적인 방법을 모색하여

예수님을 우리의 진부한 도식안에 가두지 말자고 하셨다.”(같은 신문)

그러시면서 현재의 상황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다.”

(같은 신문)고 하시면서 변화의 절박함과 시급성을 말씀하셨다.

특별히 이 변화를 위한 요한복음사가의 편집 의도는 각별하게 보인다.

시간적으로 맞지 않지만 성전 정화 사건(요한 2,13-22)

카나의 혼인 잔치 바로 다음에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른 공관복음에서 볼 수 없는 말을 하고 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요한 2,19)

 

이 말씀은 교회의 자기 변화, 즉 자기 복음화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변화도 리모델링 정도가 아니라 그 범위를 훨씬 벗어나는 엄청난 변화,

즉 새로운 창조, 새로운 개혁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창조와 개혁도 다른 방식이 아니라 복음적인 방법,

예수님 식의 변화와 쇄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사제들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사제들의 생각이 도무지 바뀔 것 같지가 않다.

사제들이 바뀌지 않기 때문에 소공동체가 어렵다.

사제들의 변화 없이는 벼랑 끝에 서 있는

심각한 교회의 위기를 절대로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